돌깡신선

(2003-09-03 23:22:25, Hit : 4872, Vote : 829)

소년 같은 할아버지

[안도현 시인의 러브레터 78] 소년같은 할아버지

그러나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선 초로의 기사가 야생마처럼 좌충우돌 날뛰는 것에 대하여 혀를 차지는 마시라. 이 나이쯤 되어서는 부드러운 행마와 흑백간의 조화로운 화합으로 화국(和局)을 연출하는 것이 보기에 좋을 것이나 나는 아직 완성된 장인이 아니다. 아직은 힘이 닿는 데까지 바둑의 본령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은 소년의 마음 그대로일 뿐이다.

- 조훈현 사이트의 산문 "드라마 '올인'에 관하여" 중에서

바둑 기사 조훈현님의 홈페이지에 가면 그이가 쓴 몇 편의 에세이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글이 맛깔스러워 몇 차례 저도 드나든 적 있습니다.

글이든 바둑이든 그이는 여전히 젊습니다. 조화와 화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실험과 도전의 정신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이는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미완성의 자리에 놓아두는 것, 다시 말하면 완성을 두려워하는 정신이 조로(早老)를 막아내는 법입니다.

나이 좀 먹었다고, 목에 힘줄 일 아니며, 뒷짐 지고 걸을 일 아니며, 괜히 헛기침 일삼을 일 아닙니다. 나이는 업적이 아니라, 잊어먹으라고, 녹으라고 자꾸 쌓이는 눈 같은 것입니다. 세상이 아름다워지려면 소년 같은 할아버지가 좀 많아야 하지 않을까요?

- 안도현 시인의 러브레터 중에서 -

이글을 읽으면서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친구 처럼 지내던 유태인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1930년 생이니까 저의 어머니와 동갑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미국이래도 예의도 갖추어야 하고 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가 그러는 거에요.
절대로 자신을 늙은이로 보지마라. 우리는 친구다. 크~~~~~

이거 정말 어려웠습니다.
자기를 부를때도 엉클 아니면 그랜드파 (grand pa: 할아버지) 이런식으로 부르면 막 화를 내곤 했습니다.
자신을 그냥 이름 제리(Jerry) 로 부르라면서 칭구 처럼 지내던 그 할아버지.

술도 같이 마시고 (할아버지는 술 마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들과 같이 어울리는게 좋아서 일부러 좋은 술을 자주 사가지고 오셨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사온 술 중에 샴페인 지방에서 나온 코냑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 술이었습니다.) 저녁 때 출출하면 한국 마켙안에서 파는 열차운동 먹으러가자고 하고 같이 사우나 가자고 하고 틈만나면 음담패설 얘기해주고 웃고 떠드는 사이에 어느틈엔가 정말 친구와 같은 느낌이 들도록 만들더라구여,

사실 미국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있긴 하지만 그래도 환갑이 넘은 할아버지 하고 30, 40대의 젊은이들하고 어울리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어려웠을 때의 미국 생활도 이야기 해주고 평생 결혼생활은 6 개월 밖에 해보지 않았지만 결혼에 대해서 전혀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싱글로서의 자유를 만끽하며 나이 60이 넘어서도 여자칭구를 사귀고 있던 젊은 아니 아이처럼 순진하고 솔직했던 할아버지 제리.

나이가 들면서 건강이 좋지 않아진다고 병원을 다녀오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 하던 할아버지.

못 본지가 벌써 한 3년 되네요.
아직 건강한지?

한국에 나왔을 때 칭구를 만났는데 목에 어찌나 힘을 주고 있는지 보고 있는 내가 목이 뻣뻣해질 정도 였습니다.
목소리는 깔고 아래사람들에게 하는 말투등등 거북하기가 니글거릴 정도 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잘 안되더군요. 그렇게 하는 것도 아무나 하는게 아닌가 봅니다. ㅋㅋ

그저 있는대로 살고 있는대로 보여지고 허세 없이 사는 솔직한 삶이 투명하게 느껴지는 그런 삶이 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보고 싶네요. 제리 !